1994년 3월 어느 날
키 크고 잘생긴 하지만 조금은 버릇이 없는 듯한 ○○가 교실로 들어선다.
넘어질 듯 넘어질 듯 위태위태한 모습으로 목발을 집고
교탁 앞으로 오더니
"책 주세요." 한다.
그 순간 나는 이 아이에게 언제 나한테 책을 맡겨 놓았는지 물었다.
"책이 없는데?"
이 아이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고
"어디 앉을까요?" 한다.
○○는 전학생이었다.
키가 커서 교실 뒤쪽에 자리를 마련했었다.
"저 쪽에 앉으세요."
우리 학년은 6학년으로 교과과정이 매우 어려워져서 아이들이 공부하는데 어려움을 많이 겪고 있었다.
○○는 학교생활은 처음이었으나 공부하는데 어려움은 없어 보였다.
수학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식을 정확하게 세워서 답을 내도록 되어 있었다.
그런데 수학 시간에 문제풀이를 할 때마다 식은 사라지고 답만 덩그라니 적혀 있었다.
"그렇게 하면 안 되는데" 하면
"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되잖아요." 한다.
식도 없이 적은 답은 항상 정답이었다.
○○는 그렇게 학교생활을 시작했다.
기숙사 생활을 하며 적응해 가고 있었다.
학교는 처음 다니는 것이었지만 학급에서는 맏형이었다.
자기보다 장애가 심한 급우들을 보살피고 문제를 해결해 주며 우리는 수학여행을 다녀오고 그 외 많은 학교 행사를 함께 했다.
졸업을 앞두고 진로를 결정하기 위한 시간이 다가왔다.
모두들 본교 중학부로의 진학을 생각하고 있었다.
그러나 ○○는 일반 중학교로 진학을 해야 할 것 같은 생각이 많이 들었다.
비록 장애는 있지만 비장애아들과 비교해서 조급도 뒤지지 않는 ○○가 비장애아와의 통합을 해 보는 것도 나쁘지 않다는 생각으로 ○○를 설득하기 시작했다.
시간이 지나며 ○○는 많이 망설였다.
어느 날은 살살 달래보고 어느 날은 협박도 해 보고 .......
○○는 아직 결정을 못 내리고 있었고 일단은 일반중학교로 진학하는 것으로 하기로 했다.
그러면서 겨울 방학이 되었다.
겨울방학 기간 동안 스카우트 캠프가 있는데
○○의 일반학교 진학을 위해서 꼭 한번은 경험해 보아야 할 것 같아 캠프에 참가를 권유했다.
2박3일의 짧은 시간이었지만 ○○에게 평생에 잊을 수 없는 귀한 시간이었다.
우리 학교에서 담임인 나 말고 ○○를 아는 선생님이 없는 탓에 나는 돌쟁이 아들을 남에게 맡기고 ○○를 위해 캠프에 참가를 했다.
내가 없었다면 홀로 외톨이가 되었을 ○○를 위해 프로그램마다 쫓아다니며 함께 활동을 한 덕에 ○○는 열심히 활동했고 나름의 보람 있는 캠프의 시간을 보냈다.
○○는 나에게 감동했는지 일반중학교로의 진학을 결정했다.
힘들고 어렵겠지만 나의 생각을 따라 준 ○○가 고마웠다.
그 다음해 5월 쯤 ○○에게서 전화가 왔다.
학교생활에 대한 여러 가지 일들에 대해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며 학교생활이 생각보다 힘들다고....... 그 중에서도 가장 힘든 것은 같은 반 아이들이 자기를 장애인이라고 무시하는 것과 아이들의 생각이 너무 어린 것에 적응이 안 된다는 이야기였다.
"그래도 조금만 더 해보자."
○○는 그러겠다고 했다.
그 다음해 또 전화가 왔다.
정말 힘들다고.......
그리고 선생님이 왜 일반학교를 다니라고 했는지 그 이유를 알 것 같다고.......
얼마나 힘들었을지 당사자가 아니기 때문에 다는 모르지만 내 말에 따라 준 ○○가 고마웠다.
학교를 중단 한 후의 계획을 물어봤다.
검정고시를 하겠단다.
너무도 건전한 생각을 하고 있는 ○○가 대견스러웠다.
○○는 7남매의 막둥이로 태어났다.
7남매를 거두시느라 어머님은 고단하셨을 텐데 거기에다 뇌성마비장애가 있는 막내아들.
어머니는 ○○를 다른 형제들과 다름없이 똑같이 대했단다.
장애로 인해 모든 행동이 어눌할 수밖에 없어도 ○○에 대한 특별대우는 없었단다.
정해진 시간에 밥을 먹어야 했고 자기 몫은 자기가 감당해야 했단다.
장애로 인해 학교 보낼 생각을 못하고 형들에게 맡겨 공부를 가르쳤다.
그 옛날에 홈스쿨링을 시작한 것이다.
그리고 보기 좋게 성공한 경우가 되었다.
바른 생각과 판단을 가지고 나름대로 살고 싶은 인생으로
컴퓨터 관련 화사도 경영해 보고
지금은 다큐멘터리 작가 겸 감독으로의 꿈을 키우고 있다.
